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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005. 스페인, 너는 자유다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떠난 낯선 땅에서 나를 다시 채우고 돌아오다)-손미나

 

제목 : 스페인, 너는 자유다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떠난 낯선 땅에서 나를 다시 채우고 돌아오다)

저자 : 손미나

책소개

작가로서 첫 도전장을 낸 손미나 아나운서

<도전 골든벨>을 진행하면서 재기발랄한 ‘미나 공주’로 시청자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손미나 아나운서가 갑자기 텔레비전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1년 후, 단정했던 단발머리를 어깨까지 길게 늘어뜨리고 새까맣게 탄 얼굴에다 한층 더 생동감 넘치는 모습으로 우리 곁에 돌아왔다. 그사이 그녀에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자신의 이런 변화가 스페인의 뜨거운 태양 때문이라고 말한다. 텔레비전의 사각 틀에 갇힌 단정한 아나운서 손미나가 아닌 ‘자연인 손미나’로 보냈던 1년의 기록을 빼곡하게 담은 《스페인, 너는 자유다》는 아나운서 생활 10년의 터닝 포인트며, ‘빛나는 30대’로 들어서기 위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된 스페인에서의 ‘자유로운 젊은 날’을 담고 있다.


P.6-7

무엇보다 불규칠한 수면 시간과 식사로 나의 평범한 일상과 건강이 위협받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눈보라나 태풍이 몰아친다 해도, 혹은 땡볕 아래서 생방송을 하다 쓰러지거나 벌에 쏘인다 해도 절대 놓지 말아야 할 마이크를 고수하기 위해 꽤 위험한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겨야 했다. 부지런히 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더 바짜지기만 하는 방송국 생활의 딜레마를 끌어안은 채 일요일도 없이 일을 하느라 가족과의 시간은 언제나 뒷전이었다. 또 대학 시절을 몽땅 외국어 공부에 바쳤건만 그 열정이 무색하게도 8년간의 직장 생활은 쉬운 영어 단어조차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나의 기억을 흐려놓았다. 얻은 것도 많았지만 잃은 것도, 또 잊고 지낸 것도 많은 날들이었다.

정말 쉬고 싶었고 너무나 간절히 공부를 하고 싶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가보지 못한 곳으로 여행도 가고 싶어졌다. 자유로운 새처럼 나는 떠나고 싶었다.

그렇게 휴식과 더불어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육감적으로 느끼고 있을 즈음 때마침 읽게 된 두 권의 책이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와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먼 북소리>에서 하루키는 마흔을 넘기면 절대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다 '갖고 있는 것들을 미련없이 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알기 위해 떠나는 일'이란 결론을 내리고 그의 나이 서른일곱에 모든 것을 정리해 이탈리아로 떠났다고 했다. 그 여행에서 그는 <상실의 시대>를 탄생시켰고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또 코엘료의 <연금술사>에는 피라미드의 보석을 찾아 떠나고 싶지만 자기가 가진 양들을 포기하지 못해 방황하는 목동 산티아고가 등장한다. 고심하던 산티아고는 결국 용기를 내어 양들을 버리고 길을 떠나 피라미드에 도착하지만 그곳에 가서야 보물이 자기 집 마당에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P44-47

다음 날 아침 막 잠에서 깨어나려는데 방에 있는 전화가 울렸다.

"봉주르 마드모아젤? 프론트 데스크 입니다. 미스터 디엥께서 손님을 위해 특별히 택시 한 대를 대절해 두셨습니다. 준비가 되는 대로 내려오시면 파리 시내 어디든 가고 싶은 곳에 모셔다드릴 겁니다."

혹시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볼을 꼬집어보았다. '분명 꿈은 아닌데....' 믿기지 않는 일들은 그 전날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난 그 친절한 흑인 신사가 대절해 준 택시를 타고 파리 시내 이곳저곳을 다니며 시간을 보내다 밤이면 부부의 저녁 모임에 따라가 식사를 하고 그들과 함께 호텔로 돌아와 그가 마련해준 방에서 잠을 청했다. 그렇게 지내기를 3일, 덕분에 잘 먹고 잘 쉬고 편하게 여행을 해서인지 마음도 편해지고 감기도 많이 나았다. 더 이상은 신세를 질 수 없어 후배의 집에 머물기 위해 파리를 떠나기로 한 날, 그는 나를 기차역까지 배웅해 주었다. 헤어져야 하는 순간 그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3일 내내 곰곰 생각해 봤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네요. 아저씨가 부자인 것도 알겠고 좋은 분인 것도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렇게 큰 호의를 베푼다는 건 언뜻 이해가 잘 안 되거든요. 이런 질문을 하면 제가 고마움도 모르는 무례한 아이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도대체 왜 저에게 이렇게 잘해 주신 건가요?"

그는 마치 내가 그런 질문을 하게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듣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시작했다.

"음... 난 말이지, 돈이 아주 많은 사람이란다.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 그런데 난 사실 세네갈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무척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는 내게 공부를 한다는 건 매우 사치스런 일이었지만 난 꽤 총명하고 꿈도 많은 아이였지.

어려운 환경을 딛고 꿈을 이루기 위해 발버둥 칠 때마다 내게는 참 힘겨운 순간들이 찾아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누군가가 나타나 아무런 조건 없이 내게 호의를 베풀고 용기를 주곤 했단다. 그런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야.

그래서 나도 언젠가 성공을 하면 젊은 시절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베풀어주어야겠다고 결심했거든. 그리고 며칠 전 비행기 안에서 만난 너에게서 그 모습을 보았다. 꿈을 향해 가고 있는 젊은이가 좌절하고 절망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지. 마음속에 꿈을 간직한 젊은 사람은 아무런 조건 없는 호의를 받을 자격이 있는 거란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게 희망이 없는 얼굴을 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무엇이 너를 그리 괴롭고 힘들게 했는지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다시 힘을 낼 수 있도록 하는데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

언젠가 꼭 신세를 갚고 싶다고 말하는 내게 그는 자기한테 무언가를 돌려줄 생각 말고 내가 그의 나이가 되었을 때 또 다른 젊은 누군가가 꿈을 향해 가는 길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길 바란다고 했다.

한겨울의 파리 기차역, 기차에 오르기 위해 바쁜 걸음을 옮기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난 그와 말없이 긴 포옹을 나눴다. "Thank you, Mr. Dieng, Thank you..." 눈에 가득한 눈물 때문에 형체가 또렷하지 않은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내가 혼자 되뇌고 또 되뇌인 말이다. 고맙다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은 듯싶었지만 지금 와 생각해 봐도 고맙다는 말 외에 내가 더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던 것 같다.

생각하면 할수록 참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절망적인 순간에 내 앞에 나타나 거짓말처럼 아무 조건 없이 많은 것을 주고 사라져 버렸다.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대로 주저않을 수는 없었다. 미스터 디엥을 만난 파리 여행을 통해 다시 일어설 용기와 힘을 얻은 나는 며칠 후 마드리드로 돌아왔을 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보니 미처 보지 못했던 희망과 행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심지어 나는 서서히 스페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미스터 디엥과의 짧은 만남을 통해 나는 알게 되었다. 꿈을 향해 가는 길에는 항상 고통이 따르고 고난의 순간들이 있게 마련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한다면 반드시 그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소중한 사실을.

P.56-65 라파엘, 다운증후군을 앓는 천사

라파엘은 성경에 나오는 천사의 이름이다. 1995년 가을 스페인에서 나는 살아 있는 천사를 만났고 그의 이름도 라파엘이었다.

학창시절 스페인에 머물렀을 때 우여곡절 끝에 내가 정착해 살게 된 마드리드의 아파트는 마치 영화 <스페니쉬 아파트먼트>에 나오는 집과 같았다. 스페인의 각 지역에서 모여든 대학생들과 슈퍼마켓 직원으로 일하던 씩씩한 여자친구, 독일에서 온 교환학생, 그리고 저 멀리 아시아의 이름도 낯선 나라 한국에서 온 나까지 우리 8명은 그 비좁고 허름한 아파트에서 날마다 웃고 울고 때로는 다투기도 하면서 인생의 아름다운 한때를 함꼐 보냈다. 봄이 시작될 때부터 그 집에서 살기 시작해 여름을 보내고 스페인을 떠날 때가 다가왔을 즈음, 나는 함께 살던 친구들 몇몇과 함께 그들의 고향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그곳은 리오하 지방의 수도 로그로뇨라는 곳이었는데 그곳에서는 매년 9월 말 추수감사절 축제에 해당하는 포토 축제, '산 마떼오 축제'가 열렸다. 축제기간에 맞춰 그곳을 찾은 우리들을 에두아르도라는 친구의 집에 머물게 되었고 그에게는 라파엘이라는 형이 하나 있었다.

에두아르도의 집에 도착해 별 생각 없이 부모님과 인사를 하고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는 라파엘을 처음 보았을 때 적지 않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라파엘은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었는데 에두아르도는 한 번도 그것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다녀오는 길이라던 라파엘은 오랜만에 동생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잔뜩 흥분을 해서는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기쁨의 눈물을 글썽였다. 허리춤까지 높이 추켜 입은 청바지와 짙은 감색 폴러셔츠를 입고 목에는 커다란 열쇠를 굵은 운동화 줄에 끼워 건 채로 라파엘은 에두아르도를 힘껏 안으며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오랜만에 사랑하는 동생을 만난 기쁨과 낯선 동생의 친구들을 보게 된데 대한 놀라움에 혼란스러워하던 라파엘이 나처럼 특이한(?) 외모의 동양인을 보고 더욱 당황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것은 나만의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당시 동양인을 처음 보다시피 했던 그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노골적으로 내게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고 에두아르도의 부모님은 나에대해 묻는 사람들 사이에서 갑자기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유일하게 나를 특별하게 보지 않은 사람은 라파엘 뿐이었다. 라파엘에게 있어 나는 그저 새롭게 알게 된 한 명의 친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다음 날 에두아르도의 가족과 우리는 아침 산책을 나갔다. 축제기간이라 그랬는지 마을 사람들은 이른 시간부터 올리브와 마티니 한 잔으로 입맛을 돋우기 위해 동네 수집들을 돌며 수다를 떨었다.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모두가 화장실이 급해져 발걸음을 서두르게 되었는데 막상 집 앞에 도착을 하고 나니 에두아르도의 가족은 조용히 서서 라파엘이 문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라파엘은 목에 걸고 있던 열쇠를 문고리의 열쇠 구멍에 꽂으려 애를 썼지만 도무지 뜻대로 되지 않는 듯했다. 그냥 아무나 열쇠를 대신 꺼내 열거나 라파엘을 도와주면 될 것을 가족들 중 어느 누구도 그럴 생각을 않고 "라파엘, 너는 할 수 있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다들 급하다더니 대체 왜들 그러고 있는지 답답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드디어 라파엘이 문을 여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라파엘의 부모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라파엘에게 키스를 해주며 "역시 너는 최고야~ 너는 대단해! 우리 라파엘, 잘했다. 사랑해~" 라는 말을 해주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라파엘의 부모님은 라파엘이 스스로 가장 잘 한다고 생각하는 두 가지 일, 대문을 여는 일과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는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라파엘에게 맡겨두었다. 그리고 라파엘이 문을 열거나 사진을 찍고 나면 그가 마치 올림픽 금메달이라도 딴 것처럼 기뻐하고 칭찬해 주었다. 물론 한 번도 쉽게 문을 여는 적이 없었고 사진이 제대로 나오는 일도 드물었지만, 라파엘은 매일 반복되는 그 두 가지 일로 인해 자신이 매우 특별하고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니 처음 만났던 날, 라파엘이 목에 걸고 있던 그 열쇠는 대문을 여는 열쇠가 아닌 날마다 그의 행복을 여는 열쇠였던 것이다.

우리는 그날뿐만 아니라 거의 매일 아침 마티니 산책을 나갔다. 동양인이 드물었던 그 마을에서 웬 아시아 여자가 다운증후군 청년과 아침마다 마티니를 마시러 다닌다는 사실은 순식간에 큰 화젯거리가 되었고 사람들은 누구나 나와 친구가 되고 싶어했다.

어느 날 우리는 라파엘의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모두가 다운증후군이나 정신지체장애를 앓고 있는 특수학교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동양의 신비로운 나라에서 온 여자아이가 자신들을 보고 놀라거나 싫어하진 않을까 해서 선뜻 용기를 내어 다가서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 뜻밖의 상황에 라파엘은 약간 주저하며 내게 친구들을 소개해 주었는데 나는 그 친구들 하나하나의 볼에 베시또(스페인의 인사법으로 서로의 볼에 가벼운 키스를 하는것)를 해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 라파엘은 그 일로 학교에서 일약 스타가 되었다. 저 멀리 꼬레아에서 온 라파엘의 여자친구가 아무 거리낌 없이 베시또를 해주었다는 이유로 친구들이 자기를 진정한 영웅이라 부르며 자랑스러워했다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라파엘은 감격에 겨워 연신 땀을 흘려가며 그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난 단지 라파엘의 친구들이기 때문에 반갑게 인사해 주었을 뿐이었는데 그 일은 우리 관계에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 스페인어에 서툴렀던 나와 스물아홉의 나이에 열다섯 살 정도의 정신연령을 가지고 말도 어눌한 라파엘, 의사소통을 하기도 어려울 것처럼 보이던 우리 두 사람은 정말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가 되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산 마떼오 축제와 함께 우리의 우정도 무르익었다. 우리는 날마다 마을 사람들이 맨발로 포도를 밟는 행사가 열렸던 에스뽈론 광장 근처 구시가지 구석구석을 함께 누비며 각종 와인을 맛보았고, 나는 가는 곳마다 그곳을 처음 찾은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극빈 대접을 받았다. 술집 주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내게 사진을 찍어달라, 벽에 한글로 이름을 남겨달라 부탁을 했고 그 사진 속에는 모두 라파엘의 모습이, 또 그 낙서에는 라파엘의 이름이 함께 남겨졌다.

라파엘은 날마다 눈만 뜨면 나를 찾아와 "너는 나의 가장 좋은 친구야, 맞지?"라는 다짐을 했고 산책을 할 때도 꼭 내 손을 잡고 걷기를 원했다. 축제의 마지막 밤에는 모두가 강가의 잔디밭에 자리를 잡고 누워 하늘 가득 터지는 불꽃놀이를 즐겼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마치 영원과도 같이 느껴졌던 그 시간, 그 여름 밤 강가에서 나를 향해 눈부시게 쏟아지던 수많은 불꽃을 바라볼 때도 내 곁에는 라파엘이 있었다. 행복한 미소를 짓고 "미나, 너는 나의 가장 좋은 친구야"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축제가 끝나고 이별의 순간을 눈앞에 두고 있던 날, 늘 착한 아이처럼 굴던 라파엘이 큰소리를 내며 투정을 부렸다. 헤어지는 것이 두려워 내 얼굴 보기를 아침 내내 외면하며 딴 소리만 하는 라파엘 대신 라파엘의 엄마가 내게 선물 꾸러미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나무 조각을 엮어 만든 팔찌 하나와 낡은 청치마 하나가 들어 있었다. 라파엘의 엄마는 라파엘이 나에게 선물을 하기 위해 3일 밤을 새워 나무 팔찌를 만들었고 어릴 적 입던 낡은 청바지를 잘라 미니스커트를 만들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밤새 그 나무 조각을 만지작거리며 나와 헤어짐을 아쉬워했을 라파엘을 생각하니 그 팔찌를 차마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라파엘도 울고 나도 울고...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다시 만날 기약 없는 그 이별의 순간을 어떻게 맞아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내가 라파엘에게 선물하기 위해 동양화가 그려진 부채를 꺼내 들자 라파엘은 더욱 큰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나는 부채 위에 '뿐또 이 세기다'라는 스페인 속담을 적어주며 말했다.

"라파엘, 이것 봐. 뿐또 이 세기다. 이 말은 끝은 곧 또 다른 시작이란 뜻이야. 헤어짐은 곧 또 다른 만남을 의미한다는 거지. 우리가 이렇게 헤어지는 것은 사실 이별이 아니라 다시 만날 약속을 하는 것과 같아.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 내가 너의 가장 좋은 친구인 거 맞지? 그런 것처럼 너도 나의 가장 좋은 친구란다. 라파엘~."

거짓말처럼 라파엘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갑자기 신이 난 라파엘은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꺼내 와 사진을 찍었고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마지막 식사를 함께 할 수 있었다. "뿐또 이 세기다!" 라파엘은 밥을 먹기 시작할 때부터 기차역에서 마지막으로 나와 포옹을 하던 순간까지 활짝 웃는 얼굴로 계속 그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옮기다 다시 뒤를 돌아봤을 때 라파엘의 얼굴을 또다시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남과 다른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별한 것이다. 하느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는 사람이기 때문에 남과 다른 특별히 맑은 영혼을 주신것이라며 뜨거운 사랑으로 라파엘을 키운 그의 부모님, 그리고 그들의 바람대로 인간의 마음에서 악한 부분은 모두 걸러내고 순수함과 진실함, 따뜻함마능ㄹ 간직한 채 살아가는 천사 같은 라파엘, 1주일간의 리오하 여햄에서 만난 그들은 내게 삶의 진정한 의미와 진실한 사랑, 그리고 온 마음을 열어 한 사람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알게 해주었다

까사 보띤에서 식사를 했던 다음 날 나는 꼭 9년만에 내 친구이자 라파엘의 동생인 에두아르도를 다시 만났다. 라파엘의 안부를 묻는 내게 그는 라파엘이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지만, 라파엘을 보고 싶다는 나의 부탁은 거절했다. 섭섭한 마음이 들어 그 이유를 물었다.

"라파엘은 네가 떠난 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네 이야기를 했어, 헤어짐은 곧 또 다른 만남이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이제 미나는 오지 않을 거라고 말할 때마다 불같이 화를 냈지. 미나가 분명히 곧 다시 만날 거라 약속했는데 왜 그런 소리를 하냐며 한 번도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어. 하지만 그게 벌써 거의 10년 전이잖아. 이제 겨우 너의 존재를 잊었는데 이제 와서 네가 라파엘을 다시 만나면 라파엘은 또 다른 10년을 너를 기다리며 보내게 될지 몰라. 우리 모두는 그 약속을 곧 잊었지만 라파엘은 그 약속을 포기하는 데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단다."

너무나 미안하고 후회스러워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따. 라파엘은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를 그리고 우리의 약속을 변함없이 굳게 믿어주었는데, 나는 사는 게 바쁘다는 이유로 라파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살아있는 천사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 '미안하다 라파엘. 정말 미안해...' 난 결국 펑펑 눈물을 쏟고 말았고 그런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친구는 날 위로하듯 말했다.

"어쩌면 라파엘은 아직도 마음속으로 네가 오길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하지만 그에게 기약 없는 약속으로 또다시 거짓 희망을 안겨주는 건 너의 욕심일 거야. 라파엘의 그런 조건 없는 사랑과 절대적인 믿음을 우리 같은 사람들이 이해하기는 힘들지. 하지만 그거 아니? 우리는 라파엘을 이해못해도 신기하게 라파엘은 우리 마음속까지 다 헤어리고 있다는 거..."

에두아르도의 말이 옳았다. 라파엘이기에 다시는 만날 수 없다 해도 내 마음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라파엘, 알지? 넌 여전히 나의 가장 좋은 친구야. 너 같이 특별한 사람을 알게 한 나의 운명에. 그리고 내 친구가 되어준 너에게 정말 감사해. 나도 실은 너와의 약속을 잊은 적이 없었는데.... 그것만은 믿어주렴. 언제 어디에서라도 행복하길 바랄게. 사랑한다. 라파엘. 진심으로 그리고 아주 많이....

P.207-208

그런데 그 순간 짜증이 아닌 웃음이 났다. 내가 무슨 걱정이라도 할라 치면 무조건 "노 빠사 나다(별 일 아니야)"라는 말로 만사를 형통시키는 법을 알려준 스페인 친구들의 덕분이었다.

내가 고민을 털어놓을 때마다 나의 스페인 친구들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이 아니면 슬퍼하지 말 것이며 인생을 뒤흔드는 일이 아니라면 그냥 웃어버리라고 어깨를 툭툭 치며 조언을 해주곤 했었다. 자기들이 볼 때 나는 너무 심각하다나? '걱정을 왜 해? 문제가 있으면 해결을 하고 해결이 안 되면 그냥 포기해.' 그들의 삶의 논리는 그렇게 단순했다. 모든 일에 같은 원리를 적용해서 무조건 웃어넘기든지, 아니면 바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죄다 잊어버리든지.

그렇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도 그냥 웃어버리는 수밖에, 물론 내게 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스페인에서 생활한 지도 어느 덧 10개월, 웬만한 일은 그저 '하하하, 그럴 수도 있지. 그냥 그렇게 대충 받아들이지 뭐, 그게 뭐 대수라고...' 하는 식으로 웃어 넘길 수 있게 된 내 자신에 나도 놀라고 있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마지막으로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났던 게 대체 언제였는지도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P.331-332

나는 여전히 '손미나'이고 한국인이고 아나운서이고 30대 초반의 싱글이다. 내 인생에 드라마틱한 변화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우려했던 것처럼 1년간의 여행이 나의 인생을 뒷걸음질치게 하지도 않았다. 그 여행이 내게 가져다준 것은 겉으로 보이는 변화가 아니었다. 10년ㅈ 전 미스터 디엥과의 우연한 만남이 젊은 날의 나에게 무한한 용기를 주었듯이 스페인에서 1년간 내가 겼었던 일들과 그곳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스페인 에서 돌아온 후로 다시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내 앞에 놓여있던 인생의 갈림길에서 내가 택하지 않은 그 길을 갔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을 알 수 없듯이, 내가 선택한 이 길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도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의 의지대로 선택한 길을 감으로써 나의 꿈과 나의 인생을 내가 직접 디자인 할수 있다는 용기와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렇게 떠나지 않았더라면 언젠가 나의 젊은 날을 돌아보는 시기가 왔을 때 분명 가슴을 치며 후회했을 것이다. 새로운 무언가를 하기엔 늦었다고 느껴졌던 그때야말로, 실패한다 하더라도 한 번쯤 도전해 볼 수 있는 시기였음이 분명할 테니까.


DM : 스페인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알게 되어 읽게 된 책. 잘 알지 못하던 손미나라는 사람의 꿈을 향한 질주, 추진력을 느낄 수 있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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